갑자기 생각난 슬픈 일 세가지.
1. 외할머니가 키우던 강아지 복순이가 죽었다. 이모가 준영이 낳고 얼마 안돼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 죽었단다.
2. dada는 이제 장사장님의 가게가 아니다. 그래도 문을 닫은 것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다.
3. 남자친구가 시골집으로 내려간다. 이제 나는 누구랑 노나.
아, 한가지 더. 약 여섯시간 후에 출근해야 한다. 제기럴…
갑자기 생각난 슬픈 일 세가지.
1. 외할머니가 키우던 강아지 복순이가 죽었다. 이모가 준영이 낳고 얼마 안돼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 죽었단다.
2. dada는 이제 장사장님의 가게가 아니다. 그래도 문을 닫은 것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다.
3. 남자친구가 시골집으로 내려간다. 이제 나는 누구랑 노나.
아, 한가지 더. 약 여섯시간 후에 출근해야 한다. 제기럴…
열세시간 정도 잔 것 같다. 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집에 아무도 없거나 먹을 것이 없는 상황이 정말 싫다. 사람도 있고 먹을 것도 있으면 좋기야 하지만, 그 둘 중의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는 없다. 둘 중에 하나만 있으면 그제서야 그것이 정말로 소중하게 느껴진다. 사람은 없지만 먹을 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혹은 먹을 것은 없지만 그래도 같이 무언가 먹으러 나가거나 나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줄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 결국 ‘먹는 것’이 전부인가? 아무튼 그래서, 어제 퇴근하는 길에 저녁거리와 함께 아침거리도 사왔다. 일어났을 땐 이미 아침시간도 심지어 점심시간도 지나있었고 목구멍에 까칠한 느낌으로 넘어가는 밥알이 그리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먹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다행이었다.
일어난지 이제 겨우 세시간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저녁먹을 시간이다. 내 일상생활 패턴으로 따지면 퇴근이 한시간 남은 시간이다. 요즘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재미보다는 싫증이고, 보람보다는 회의감이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재미나 보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다. 조금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친구를 만나거나 애인을 만나서 일 얘기 하는 것이 껄끄럽다. 즐거운 자리에서 굳이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다. 실수하는 일도 지겹고, 그것으로 구박듣는 일도 지겹다. 열정이 있으면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열정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열정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동경이 있지도 않았다. 호기심? 그 정도면 설명이 되려나.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냥 나는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신중하지 못한 태도로 의심없이 잡았을 뿐인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인데, 나는 원래 내 발로 벼랑 끝에 떨어진다 해도 후회같은 건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일을 하면서 겪는 고충들은 때때로 어딘가에서 읽은 현업종사자들의 글, 친구들과의 대화, 어른들과의 대화 속에서 ‘일반적인 것’들이 된다. 그 점이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아픔이 되고 실망이 된다. 일 적인 것 안에서, 어느것도 흥미롭게 혹은 자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나는 ‘일’보다는 ‘사람’에서 의미를 얻는 부류일까. 우리 실장님을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여러가지 감정을 느낀다. 존경과 고마움, 따뜻함에서부터 실망과 미움까지. 그러한 감정들은 아직 미묘하게 엉키고, 정리되지 않은 어정쩡한 채로 불쑥 표현되거나 더욱 깊숙히 숨기게 되거나 한다. 이렇게 미묘하고 어정쩡한 감정들도 하나의 스트레스가 된다. 그러나 항상 생각하고 있는 점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노력하자는 것이다. 그 것이 되지 않으면, 억울한 일은 너무나 많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피고용인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나는 행운의 수혜자가 되기도 한다.
결국, 마지막에 내가 느낄 감정은 감사함이겠지. 아픈 기억은 희석되고 좋았던 기억만이 더욱 미화되어. 지금으로썬 그 사실마저 아니꼽지만, 어쨌든 그건 살아감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일은 다시 일상이고, 나는 어쩌면 지금 일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절망적이라고 해서 조금도 희망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길 바라고, 동시에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길 바란다. 배움의 선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것이 일에 활용할 수 있는 배움이든, 내면을 성장하게 하는 배움이든, 그리고 그 둘 중에 어떤 것이 우선이든,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배움을 느낄 수만 있다면 좋겠다. 충실하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이다.
어느 인터넷 기사 하나를 읽고, 아무 생각없이 스크랩해놓고, 결국 그 기사를 스크랩씩이나 한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연한 것을 마치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꾸며놓은 그 인터넷 기사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혹할 주제의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어떤 훌륭한 사람이 있어, 그 훌륭한 사람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은 이러이러한 특징을 가졌지, 너희도 분명 그 훌륭한 사람처럼 되고싶을거야, 그러니 그 사람처럼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사고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다고들 하지만 지금까지 내 경우엔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말 뿐인 것들, 고집스럽게 한 면만 보는 헛똑똑이들,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눈만 껌벅이는 다수의 사람들, 정말 지겹다. 아무리 떠들어봤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내가 느낀건, 사람들이 가진 부유함과 가난함은 딱 ‘아름다움’정도로 상대적이라는 것.
지지난 주말이었던가, 경복궁으로 가던 길에 보안 여관을 구경했다. 여관은 묘한 장소다. 어렸을 때 나는 잠시 여관에 살았던 적이 있다. 손님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우리 할머니가 여관을 하셨다. 여관에 살았을 때 기억은 희미하지만 선명하다. 그 옛날식 전화기와 손님방과 로비를 연결하던 커다란 전화기(그걸 뭐라 칭하는지 기억이 안난다…)와 또 우리가 살던 공간 옆에 쭉 들어가면 있던 어두컴컴하고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나던 골방 비슷한 것과 그 골방의 노란 백열등 전구와 그 곳에 있던 낡은 서랍장과 그 서랍장에 꼭꼭 숨겨두었던 내 셀로판지들. 나는 그 시절에 셀로판지 모으는 것이 취미였던가보다. 엄마에게 곧잘 셀로판지를 사달라고 졸랐었고 그걸 가지고 나는 무엇을 했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꼭 어느 한 색깔이 없어지곤 했었다. 그래서 그 색깔 하나를 채우기 위해서 새 셀로판지를 사야만했고 그렇게 엄마한테 새걸 사달라고 조를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르지만 불안했었던 것 같다. 어느날은 가끔씩은 엄마는 나에게 셀로판지를 사주지 않았고 나는 분한 마음에 그 골방안에 들어가서 한참을 울었다. 이불이랑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선 끙끙대며 울었다. 그렇게 울면서 잠이 들었었고 초저녁쯤 되어서 일어났을 때엔 엄마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나를 달래주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어느정도 기분이 풀려서 한동안은 셀로판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이건 정말로 그랬다는건 아니고, 그냥 내 기억 속의 가공된 이미지일수도 있다. 그래도 어느정도 그건 슬픈 일이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저께 동해에 내려왔다. 엄마는 여관에 살 때 일어났던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옆방손님이 시끄럽게 군다는 이유로 어떤 남자가 과도같은 것으로 옆방손님의 심장부근을 찔렀다. 칼에 찔린 손님은 로비까지 내려와 살려달라고 말하며 엎드렸다. 손님의 심장에서는 피가 펑펑 튀어나오고 있었고 엄마는 수건으로 그 손님의 심장부근을 막고서 119인지 112인가에 신고를 했다고 했다. 결국 그 손님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었다. 여관에서 일하던 아줌마는 아기였던 내 동생을 업고 있었는데, 술에 취한 살인자의 손에서 칼을 뺏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막상 어떤 사람에게 그렇게 위험하고 잔인하고 끔찍한 순간이 닥치면, 그 순간은 현실감이 없어서 오히려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게 되고, 그 사건이 어느정도 정리가 된 후에야 비로소 끔찍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니 살인자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던 그 아줌마의 행동은, 용기라기 보다는 본능이나 무의식에 가까운 행위였을지도 모르겠다. 또 한가지 여관에 대한 기억은 여관 맨 꼭대기층에 있던 장기간 묵는 손님이나 단체손님의 방에 대한 기억인데, 옥상과도 연결되던 그 커다란 방은 어딘지 휑하고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게하는 방이었다. 아줌마나 할머니가 여관청소를 할 때 나는 여관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놀곤했는데 이상하게 그 방에 가는 것만은 무척 꺼려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거나 했던 적이 있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지만 아득한 기억 어딘가에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그 곳에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움직임이 거의 없는 영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할아버지가 그 방에서 지내셨던 적이 있었다고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몇년간 할아버지의 혼이 그 방에 살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그 방은 외롭고 무서운 방이었던 거다. 보안여관을 구경하면서, 내가 살던 여관 생각이 나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을 좁고 어두운 그 방들을 보면서 나는 기억하고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기분들 때문에 막연히 우울해졌다.
동해. 혼자 넓은 집에서 밥을 먹고 책을 읽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간식거리를 주워먹는다. 쓸쓸하다. 주말에 남자친구랑 갔던 미술관이랑 경복궁이랑 광화문광장에서 퍼질러 앉아서 사진 찍던 일이랑 비싸지 않고 맛있지만 시끄럽던 이탈리안 식당이랑 그런 것들이 그립다. 역시 좋아하는 남자랑 있는 일이 내겐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깨질 것만 같아서 마음껏 행복할 수 없지만 ‘그래도 행복한’ 그 시간들이, 나에겐 가장 의미가 없으면서도 의미있는 시간들이다.
나는 지금 놀 궁리만 하며 앉아있다. 6월은 길고도, 그러나 간사하게도 지금 생각하자니 짧았던, 어시스턴트로서의 일이 끝나는 달이기 때문이다. 벌써 아쉬운 감정이 든다. 이럴 줄 몰랐는데. 친해지지 못한 사람들과 정리되지 않은 많은 것들, 못다 배운 것들을 뒤로 하고 그만두려니 아쉬운 것이다. 아. 다 끝난 것처럼 말하지는 말아야지. 남은 기간동안 무시무시한 일들이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만없이, 최대한 스트레스 받지않고, 즐겁게 일하고 싶다.
여긴 꽃도 너무 예쁘고 오솔길도 너무 예쁘다. 화분에 심겨진 꽃들이 앙증맞다. 공기가 너무 좋다.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짜증날 정도로 상쾌하다. 바람도 완전 nice breeze다. 나는 서울에서 사는 가난하고 꿈없는 노인들이 왜 시골에서 살지 않는걸까 궁금하다.
예전 일기를 보는 것은 가끔 힘겨움을 수반한다. 이따금 심장이 따끔따끔 쑤시는 통증을 느끼는데, 그 느낌이 호기심에 어쩔 수 없이 들춰본 옛날 일기들을 볼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한 때 자주 듣던 음악을 오랜만에 들었을 때, 그 음악을 자주 듣던 그 시절의 풍경과 냄새와 사람과 시간, 감정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속이 메슥거리는 기분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음악은 우연처럼 귓가에 들리고, 듣기 좋은 멜로디와 비트와 서정성이 담뿍 든 가사 덕에 과거가 마치 온통 행복했던 시절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슬프지만 그래도 행복했다고. 반면 내가 직접 고른 단어들과 써내려간 문장들은 비교적 솔직한 그 때의 심정을 떠올리게 해서 음악보다 거칠은 애상을 자아낸다. 슬픈건 그냥 슬픈거고 행복한건 그냥 행복한거고 물론 슬프지만 행복할 때도 있었다고 말이다.
참 유치했었다. 지지리 연애도 못했었다. 친구가 없어서 찌질하고 외로웠었다. 고작 몇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서 그래도 나 많이 컸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어른이 되어간다’는 진부한 문장에 공감하는 꼴이 된 것 같아 슬프다. 틈만 나면 궁상 떨고 청승 떨던 그 때가 그리워질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른 되기 싫어서 크기 싫어서 아등바등하던 나였던 것 같기도. 사실 조금 그립기도 하다. 따뜻하고 친밀했던 술잔들과 하룻밤이 새도 모자르도록 떠오르던 유치한 낱말들. 그리고 그런 것들보다, 그래도 조금은 반짝거렸을 어린 시간들이. 여전히 나는 어리지만, 그 때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 때 내가 가졌었고 (외로이)자부했던 나름의 감정세포들이 나도 모르는 새 하나 둘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이나이에 벌써 씁쓸함같은 거 느낀다고 놀림받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전부를 사랑할 수는 없다 말하는 사랑이 사랑일까. 설령 98퍼센트의 사랑과 2퍼센트의 대화 이해 배려를 약속한다 하여도 나는 그리 말하는 사랑을 믿고 싶지 않다. 탈출구를 열어둔 채 그래도 사랑하노라 말하는 것은 비겁하기 짝이 없다. 나는 정열을 믿지 않는다. 외려 권태와 시간의 배신을 믿는다. 단지 사랑에 조건을 버젓이 매달고 그것을 대화 이해 배려 따위의 그럴 듯한 말들로 포장하는 행위를 용서할 수 없을 뿐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벽해야 한다. 그래서 대화나 이해 배려가 필요없을 만큼이어야 하고 언제나 그 것들을 이기는 무엇이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용기이고 어쩌면 난 그 정도의 용기를 가질 수 있는 혹은 내게 그러한 용기를 가지게끔 만드는 사람을 찾는 어리석고 한심한 로맨티시스트일지도 모르겠다.